엘리만 혹은 마다그, 양자 택일의 문제 일단 모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작가는 그녀를 ‘성스러운 창녀, 거룩한 창녀, 저주받은 영혼들의 구원에 필요한 신성한 창녀’(p.231)로 묘사한다. 여기서 창녀는 ‘한 남자는 아들이라고 믿고 또 한남자는 조카라고 믿는, 사실은 거꾸로일 수도 있는’(p.228) 그녀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성스러운’ 부분은 ‘난 정말 혼자 아이를 수태했고, 사랑했고 아이도 그걸 알아’ (p.233)에서 보이듯 처녀 수태를 뜻할 것이다. 이 부분은 지진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세네갈의 땅은 모산에게 수태한 아이가 아산과 우세누 중 누구의 아이인지 밝히라며 ‘요란하게 으르렁’(p.225) 댄다. 그녀는 대답을 회피한다. 누구의 아이인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유령이 나에게 다가와 그의 삶의 딜레마이기도 했던, 실존이 감내해야 하는 끔찍한 양자택일의 두 항을 속삭이리라. 문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늘 흔들고 마는 딜레마. 쓰기와 쓰지 않기.’(p.539)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보이듯, 이 소설 전체는 선택에 관한 압박이다. 모산은 선택을 하지 않고 악령에 사로잡혀 정신이 나가버린다. 지진에 이끌려 땅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를 밝히기를 거부한 처녀 수태는 동정녀 마리아의 알레고리라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아들은 ‘구세주’가 된다. 그는 아산과 우세누에게서 이름을 하나씩 받은 ‘엘리만 마다그’가 된다. 파리로 건너가서 테레즈와 샤를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TC 엘리만’으로 책을 쓴다. 남미로 건너갔다 아프리카로 돌아오며 ‘음반 마다그’로 칭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생애는 아산의 엘리만에서 우세누의 마다그로 바뀌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적인 것에서 세네갈 적인 것으로. 구세주 혹은 돌아온 탕아로. 디에간의 선택 ‘비인간적인 것의 미래’를 접하고 디에간은 선택을 향한 강박에 사로잡힌다. 책 초반부의 그는 봉인된 상태다. 그는 공허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우리가 문학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대는 건 정작 문학으로 뭘 할지 알지 못해서일 거야. 우리의 문학적인 세계가 비어 있기 때문’(p.75)이다. 디아스포라 문학을 써 내려가는 검은 피부 작가들의 게토, ‘출구 없는 동굴 안에서 쥐들처럼 그 동굴 속에 갇힌 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p.67)에 사로잡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좋다, 받아들이자.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씨, 말할 수도 침묵할 수도 잊을 수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모르겠다.’(p.57) 헤메는 그에게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와의 우연한 만남은 더욱 큰 미로에 빠지게 만든다. 그를 더욱 헤메게 만들지만 결국은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하는. 이런 흐름은 조국의 민주화 시위와 이어진다. ‘사회적 고통이라는 문제 앞에서 글쓰기의 문제가 어떤 무게를 지니겠는가? 절대적인 존엄성의 갈망 앞에서 절대적인 책을 찾는 일이, 정치 앞에서 문학이, 파티마 앞에서 엘리만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p.412) 조국 세네갈의 땅에서, 분산 자살한 파티마 디오프 앞에서 디에간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대답은 명확하다. '우선 몇차 방정식인지 밝혀지고 각 항이 정해지고 미지수가 설정되고 복잡성이 주어지면, 그런 뒤에 무엇이 남을까? 문학이다. 문학이 남았고, 영원히 문학만이 남을 것이다. 문학이 답이고 문제이고 신앙이고 치욕이고 자부심이고 삶이다.'(p.465) 친구인 셰리프의 분신 자살 이후 디에간의 독백이다. ‘실존이 감내해야 하는 끔찍한 양자택일’ 앞에서, 베아트리스와 자기/자지 않기, 프랑스어로 문학하기/문학하지 않기, 프랑스에 돌아가기/조국 세네갈의 현실에 참여하기라는 양자택일에서 디에간의 선택은 결국 전자다. 문학이다. 문학이 남았고, 문학이 남을 것이다. 모든 미로를 거쳐 조국 세네갈의 우물에서 끄집어 낸 대답은 조국에 대한 배반이다. ‘민중혁명이 어찌되었는지 물어오면 너무나 여러 번 그래왔듯이 혁명은 이미 빼앗겼다고 혹은 배신당했다고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또, 베아트리스 낭가를 다시 만날 것이다.’ (p.538) 디에간은 조국인 세네갈의 현실을 외면하고 파리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 세네갈인으로서 프랑스어로 글을 쓸 것이다. '아프리카인이 되라고, 하지만 너무 되지 말'라는 요구에 따를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영도(零度) 디에간은 므심브와와 베아트리스 낭가와의 스리섬을 거부한다. 그 후 예수님의 환상을 본다. ‘예수는 다시 혼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p.92) 이것은 ‘상승’의 이미지다. 테레즈와 샤를과 스리섬을 한 엘리만은 어떠한가. 구세주의 어머니인 모산은 땅의 부름을 받고 돌아간다. 엘리만 마다그는 땅으로 돌아가 마다그의 이름을 택한다. 디에간의 거부와 엘리만의 방종을 십자가를 통한 하늘로의 상승과 지진에 의한 땅으로의 하강으로 대비시킨다. 예수는 ‘난 다시 했을 거네.’라고 대답하며 십자가로 올라간다. 두 번의 천년이 지나도 같은 상황이 닥치면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개인의 선택은 어쩌면 정해져 있다. 므심브와가 알제리의 우물로 돌아간 것처럼, 시가.D가 아버지 우세누를 그리워하면서도 증오하고 조국을 배반하겠다고 결의하듯. ‘비인간적인 것의 미래’라는 텍스트는 소설 속 등장하는 작가들에게 ‘구세주’이자 ‘악마’다. 쓰기와 쓰지 않기 중 미뤄왔던 선택을 강요한다. 선택은 진정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시가.D에게도 므심브와에게도 디에간에게도 닥치기 전 이미 선택은 개인의 수준에서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수처럼, 혹은 엘리만의 이름을 버리고 세네갈의 땅으로 돌아간 마다그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를 배제한 순백의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바로 나고, 그 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이제 네 차례야. 네 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보여줘.’(p.499) 파헤치고 파헤쳐서 밑바닥까지 가면 개인이 남는다. 절대적인 글쓰기는 없다. ‘나는 공기가 되고 싶어. 영원히. 가볍고 상쾌한 바람이 되어 사물들고 인간들 위로 아름답게 떠다니고 싶어.’(p.445) 그렇지만 ‘하늘 역시 미로이고, 땅의 미로 못지않게 비인간적이다.’(p.134) 개인은 사회를 떠나 자유롭지 않다. ‘봉인된 육체는 맹목적인 예속이다.’(p.106) 개인의 성격은 운명이다. 다시, ‘비인간적인 것의 미래’를 보자. 그 소설은 선택을 철저히 회피하고 있다. 세네갈인이 프랑스어로 쓰며,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반박을 위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파스티슈한다. 저항이면서 동시에 굴복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수치를 안기지만 또한 우리가 꿈꾸는 영광이다 우리의 종속이고, 상징적 상승이라는 독배의 환상이다.’ (p.82) 엘리만은 아산과 우세누 사이에서 여전히 헤멘다. ‘아버지’인 아산의 흔적을 찾아 헤메면서도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디에간의 선택은 엘리만의 글이다. 친구인 세리프에게 '사회적 질문들을 버려두고 자기중심적인 관심사에만 매달'(p.423)린다고 책망받지만 '비극을 받아들이고 문화적 사생아로 최선을 다해 살'(p.498)아 가는 것을 선택한다. 엘리마의 글과 마다그의 글, 같은 인물의 다른 글 중 전자다. 봉인과 방황의 길이다. 디에간은 글 말미에 그의 고향을 찾아가 ‘마다그’로서 쓴 그의 글을 수장(水葬)한다. 그로 인해 디에간은 아마도 선대(先代) 작가의 유령에 쫓기며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디에간이라는 개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고 답변이다. 답변이 개인의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탐구다. 정체성, 모든 것을 배제한 글쓰기의 영도(零度). 우리 역시 우연을 가장한 운명으로 이 책,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만났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작 중 등장인물들 처럼 어떤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나의 근원에 대한 그런 질문을 던진다. 나의 대답은 찌질하고 아프다. 작가의 대답부터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500페이지에 달하는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