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분류학’의 역사를 다룹니다. 그런데 저자는 분류학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을 넘어 다른 것들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현대 과학의 분류학이 아닌 세계 곳곳의 전통적으로 남아있는 ‘민속 분류학’을 옹호하면서 ‘움벨트’에 관해 더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분기학’(cladistics)은 ‘물고기’(fish)라는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스스로 과학자이면서 퇴출당한 ‘물고기’라는 종(種)을 다시 되찾고 싶어합니다. 책의 프롤로그부터 이런 주장이 강합니다. 과학적 사실보다는 저자의 견해가 앞서서 과학 도서라기 보다는 에세이 같습니다.
저의 편견임을 전제하고 이야기합니다만, 근래 읽었던 여성 저자들의 과학책들이 이런 경향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러했고 ‘보노보 핸드셰이크’나 ‘도파민네이션’도 같은 감상이었습니다. 여성 저자의 일상 경험에서 출발해서 과학으로 접근해 들어갑니다. 저 같이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독자한테는 상당히 좋습니다. 과학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감성적 접근 류의 책이 마냥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 사실과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어긋난다는 느낌을 간혹 받기도 합니다. 이 책의 어떤 부분도 그러합니다.
책의 가장 핵심 소재라고 할만한 ‘움벨트’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세계’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 단어를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로 확대해서 적용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며 주위 동식물을 분류하는 본능의 영역으로요. 그런 움벨트는 모든 인류 사회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가 달라도 대략 평균적으로 인간은 600 개체 정도의 종을 인식한다거나, 공통적으로 동식물을 이름 붙일 때 이명법(二名法)을 사용합니다. 이런 근거는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움벨트’라는 부분이 어떻게 보면 개개인의 ‘퀄리아’를 넘어서는 전체, 인류라는 종의 게슈탈트 적인 부분 같더라고요. ‘분류학’은 이런 본능적인 움벨트적 충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학문이고요. 문제는 분류학이 과학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이러한 인간의 본능과 괴리되어 갔다는 겁니다.
린나이우스의 분류학은 다윈을 거쳐 진화분류학이 되었고 마이어는 이를 발전시켜 생물학적 종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발달 과정에서 ‘진화’라는 과학이 끼어며 움벨트적인 인간적인 본능과 과학적인 논리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아갑니다. 스니스와 소칼의 수리분류학을 거쳐 빌리 헤니히의 분기학에 도달하면서 지금의 ‘분류학’, ‘분기학’은 ‘움벨트’를 배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근원적 지각은 저기 물 속에 물고기가 있다고 속삭이지만 과학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책 속에서는 연어와 폐어(lung fish)와 소(cow)를 예로 듭니다. 일반적인 지각으로 연어와 폐어는 ‘물고기’입니다만 분기적으로 더 가까운 생물은 폐어와 소 입니다. ‘진화’라는 과학적 렌즈를 끼고 분석하면 폐어는 연어보다는 소의 친척입니다. 폐어가 물고기라면 소 역시 육지의 물고기 입니다. 인간도, 생쥐도, 나방도, 비둘기도 모두 물고기 입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라는 분류는 없습니다. 단지 육지에 올라왔다고 생명의 가지에서 잘라내어 물고기가 아니다고 이야기하는건 과학적 논리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과 과학의 어긋남은 이미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작가의 문제 의식은 그런 괴리가 환경 위기에 대한 무자각, 무대응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현재의 지구는 수리적(numericla)으로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기입니다. 일반인들은 이러한 생태적 위기에 대해 자각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움벨트와 과학의 분리 때문이라 주장합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펴내며 과학의 언어와 일반의 언어가 통일되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흘러 왔습니다. 인간의 지각과 반대되는 ‘진화’의 언어는 일반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뻔히 물 속에서 헤엄치는데 과학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함께한 ‘움벨트’적 지각과 맞지 않습니다.
해결책으로 저자는 개개인의 ‘움벨트’적 감각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현대의 인간들의 움벨트적인 충동은 ‘자연’에서 ‘소비 시장’으로 옮겨간 상태입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의 약초를 분류하기 보다는 포켓몬의 종류를 외우기 바쁩니다. 어른들은 펩시콜라와 코카콜라의 차이, 백화점의 명품 브랜드를 통해 움벨트적 욕망을 충족합니다. 이런 현실에 저항하여 실제 자연을 느끼며 움벨트를 회복하자는 생태주의적 비전을 제시합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바다에서 범고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경이감(ephipany)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연이 주는 깨달음을 통해 움벨트를 되찾고 생태 위기를 자각하자고요. 일견 설득력이 있습니다만 저는 위에서 밝혔듯 논리와 주장의 연결이 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저자 자신이 밝혔었지요. 그 책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비판하는 핵심 근거는 ‘스트리크닌’이라는 독약 이었습니다. 조던의 저작에 독약의 이름이 나왔다고 독살의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에둘러 추측이라 포장하더라도 후반부의 이야기 전개 자체가 그런 ‘독약의 논리’ 위에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설득력이 부족했었습니다. 이 책도 같은 단점이 있습니다.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움벨트’라는 소재를 너무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 같습니다. 움벨트적 본능이 살아있는 ‘민속 분류학’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만 현재의 분기학과 비교하면 폭력적인 부분은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간이 자연에 이름 붙이고 분류하고자 하는 충동은 이미 나쁘고 좋다를 떠난, 그것 자체가 지적 ‘폭력’ 입니다. 분류학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의 동 식물을 멸절시키고 죽여 왔습니다. 방향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움벨트 자체에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모든 부분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드 와칭이나 범고래 관찰을 통한 움벨트적 경이감의 회복이 생태 보호와 연결된다는 논리는 비약이고 과장입니다. 역으로 작가의 주장 대로라면 일반인에게 필요한건 움벨트의 회복이 아니라 과학 교육이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대멸종을 먼저 깨달은 이유가 수리적(numerical) 분석이었다면, ‘일반인’에게도 수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답답한 현실에 대안을 찾고자 하는 서술은 찬성하지만 주장이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차라리 ‘트랜스 휴머니즘’이나 ‘반출생 주의’가 솔직하게 다가옵니다.
단점을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하는건 이상하지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가독성이 좋습니다.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이해하기 힘들거나 막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물고기’의 존재, 자연을 더 민감하게 느끼고 아껴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는 찬성이고요. 저에게는 장단이 있는 책이었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좋게 읽었으면 이 책도 마음에 들겁니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 알맞는 따뜻한 책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