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홍학의 자리, 테라피스트, 클라라와 태양, 시 읽는 법, 페퍼민트
홍학의 자리 - 정해연
서술트릭 그 자체는 미스터리를 평소 접했던 독자층이라면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튀는 점은 사실 등장인물의 조형이라고 본다. 작가 후기에서도 '인정'을 테마로 글을 진행해 나갔다고 쓰고 있다. 사회학자인 미드의 이론인 주어 나(I)와 목적격 나(me)의 갈등에서 생겨나는 긴장감 위주로 글을 끌고 나간다. 대부분의 주인공은 '겉'과 '속'이 다르다. 특이한 점은 그것이 개인의 성격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일본 미스터리에서 흔히 보았던 '혼네'와 '다테마에'식의 캐릭터의 성격에서 생겨나는 갈등보다는 인물의 처해있는 가정과 사회, 즉,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 사이의 틈에서 생기는 물적 갈등이 주를 이룬다. 그 점이 작품의 설득력에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미스터리 보다는 스릴러나 호러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에게 무난하게 추천가능할 듯.
테라피스트 - B. A. 페리스
독토 어느 여성 회원 분의 추천해 주신 책이다. 읽고 나서 검색해보니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괜찮은 것 같다. 남여 가릴 것 없이 권할 만한 소설이긴 한데 감상의 포인트가 많이 다를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단순히 나레이터가 여자라는 점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여자로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에 대해 절묘하게 다루고 있다. 배경이 클로즈드 서클을 연상하게 만들도 코지 미스터리 느낌도 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호러다. 그전에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와 정말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이어지는 느낌도 든다. 둘 다 여자 독자들이 더욱 반응할 만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내가 찾아서 볼지는 모르겠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
클라라와 태양 - 가즈오 이시구로
소재와 테마 자체는 개인적으로 식상한 점이 있다. 초중반 정도까지는 '하세 사토시'의 '당신을 위한 소설'이나 '야마모토 히로시' (山本弘)의 '아이 이야기'(アイの物語)가 같은 소재를 다룬 소설로서는 더 낫지 않나 싶었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테마 자체는 식상하지만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꽤 있다. 클라라라는 AI를 초점자로 소설 전체를 끌고 가면서 독자에게 제한된 정보만을 전달한다. 보통은 클라라의 인지 능력을 초월해서 독자가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몇몇 부분은 모호하다. 등장하는 사람 캐릭터들이 이상하게도 클라라에게 무한 신뢰를 보낸다거나 작품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매장 판매원의 행동 등은 숙고해 봐야할 부분 같다.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작가의 '사회학'적인 상상력이다. 향상된 사람과 비향상된 사람과의 차별, 그 차별에 따른 아예 다른 물적 공동체, AF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분노는 식상한 설정이지만 쿠팅스머신, 폴, 벤스로 대표되는 백인 남성 공동체로 암시되는 탈 중앙화된 정부, 드론 기술에 대해 토론할 때 공격 무기부터 거론하는 점 등등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이런 점들이 독자에게 제한된 정보만으로 암시되기 때문에 퍼즐을 풀어 나가야 한다. 앞에서 말한 형식적인 특징과 내용적인 면이 결합해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단순히 기존 SF나 서브장르인 사이버펑크 내부의 사유만이 아니라 작가 고유의 철학, 사회학 적인 가제트가 두드러진다. 오히려 메인 테마보다는 이런 주변부가 더 흥미롭다. 아니,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일 수 있다. 이 소설은 어빙 고프만의 자아 개념에 관한 책들을 읽고 서평을 써보고 싶다.
시 읽는 법 - 김이경
박준 시집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를 읽고 시에 대해 흥미가 생겨 읽어보았다. 원했던 것은 은유나 문단 구성 같은 시 분석에 필요한 도구였는데 그것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시에 대해 분석하려면 오히려 이 책 후기에 소개된 다른 책들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읽기 전의 내용에 대한 예상과는 달랐지만 감상은 나쁘지 않다. 글이 성실하고 정직해서 호감이 간다. 내면에 담담한 울림을 준다. 특히 '역사로 시 읽기' 파트는 좋았다. 시집을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앞으로도 작가가 말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읽게 될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된 시 보다는 드라이한 현대시 위주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처럼 시를 이제 읽기 시작했거나 시에 대한 좋은 에세이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페퍼민트 - 백온유
집안에 아픈 간병 환자가 있다면 많이 와닿을 작품이다. 즉, 개인의 경험에 따라 감상이 매우 다를 작품이다. 작품 자체는 평이하고 직설적이다. 이게 나쁜 점이 아닌게 심각하고 어려운 주제를 정면돌파하는 장점이 있다. 시안과 해원이라는 19살 여성 캐릭터가 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작중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담담할 정도로 캐릭터를 까발려 묘사한다. 그 점이 내용이 진행될수록 독자에게 정서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서사 자체의 흐름은 '짐작이 간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흐름 속에서 아파하는 캐릭터들은 초월적이다.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미묘한 지점이 있다. 그게 소설이라는 도구의 미덕이 아니던가. 어떻게 보아도 군더더기 없이 잘 쓴 소설이다. 개인의 호불호는 있어도 작품 자체의 성취는 부정하기 어렵지 않을까. 작품의 결말은 이 소설을 단순한 빈곤 포르노로 만들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져서 어느 정도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오히려 쉽게 권하기는 힘든 작품이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소울 메이트'와 마찬가지로 이런 내용에 내가 정서적으로 약한 면이 있다고 느낀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간병', '프록시모'라는 주된 소재 보다는 두 주인공의 질척한 느낌에 정신이 없었다. 작가도 무게 중심을 경계하면서도 그 부분을 묘사하고 싶은 매력을 못 떨친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