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처음 이 책을 읽고 뭔가 걸리는 점들이 있었습니다. '인육'이라는 소재가 파격적이었지만 그것보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결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세실리아가 재스민의 아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소설의 전개상 맥락에 안 맞게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내 속에서 그럴만하지 않나라는 속삭임도 있었습니다. 이런 엉뚱하지만 납득이 되는 결말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오마쥬 같기도 합니다. 세상의 도덕률에 반항하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최후에 소냐의 사랑에 감화되어 두 연인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도덕은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서의 외침, '혁명 이전에 사랑'과 통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이런 여러 문제를 극복하는 열쇠로 아기로 연결되는 '가족애'를 강조하는 소설로 보아야 할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찝찝함이 머릿속 들러붙어서 떠나가지 않더라고요. 다시 읽으며 저 나름대로 정리해 봅니다.
이 책의 처음은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은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 질 들뢰즈
소설은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불일치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언어의 문제를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드러냅니다.
'편리하고 위생적인 단어들이 따로 있다. 적법한 단어들.' (p.13) '그들은 인육을 '특별육'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냥 '고기'가 아니라 이제 '특별 안심', '특별 저민 고기', '특별 콩팥'이라고 불러야 했다.' (p.19) '그는 우라미 사장이 언어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말을 통해 현실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p.23) '말은 블랙홀이다. 모든 소리와 모든 입자, 모든 숨결을 흡수하는 구멍이다. 세실리아는 대답이 없다.' (p.120) '우를레트의 종교는 인간을, 언어를, 사진을, 풍미를, 영혼을, 고기를, 책을, 존재들을 수집하는 일에 전념한다.' (p.202) '그녀의 말은 작은 올챙이들처럼 끈적이는 흔적을 뒤에 남기며 몸을 질질 끌고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서로 겹쳐져 쌓이고 썩어 고약한 냄새로 공기를 오염시킨다.' (p.263)
이런 일부분의 인용 말고도 작가는 언어의 문제, '말하기'를 끊임없이 글 속에 늘어놓습니다. '인육'이라는 목적으로 길러지는 가축 인간은 '말하는 것'에 대한 탐구를 위한 설정이라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람과 '가축'의 차이점은 '말하기'입니다. 가축으로 길러지는 사육인간은 성대는 제거되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합니다.
'가끔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그럴 수 있는 것처럼.' (p.197) '점점 더 민첩하고 지적인 것처럼 보이는 녀석들이 보여요. 마치 그게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p.203)
그 '특별육'들은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질 들뢰즈의 위 문장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사이에는 무엇이 들어갈까요?
보는 것 - (생각하기) - 말하는 것
책 속의 인간들은 특별육들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과 달리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라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통해 우리가 본 것을 구조화시킵니다. 그 구조화의 과정을 작가는 생각이라 규정합니다. 생각의 범위는 '편리하고 위생적인 단어들이 따로 있다. 적법한 단어들'(p.13) 일 것입니다. '적법한 단어들'은 사회규범입니다. 혹은 밈, 혹은 아비투스를 통한 장(field), 혹은 어빙 고프먼이 말하는 연극적 사회의례,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담론이라는 개념, 혹은 유발하라리가 내세우는 상상의 구조물... 같은 것들입니다. 명칭이 무엇이든 '보는 나', 즉 '경험하는 나'와 '말하는 나', 즉 '이야기하는 나' 사이에는 우리 바깥에서 규정한 '적법한 단어들'이 들어섭니다.
보는 것 - 사회규범 - 말하는 것
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 생각을 바깥의 시스템에 의탁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 감정,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사회규범이 우리의 생각을 규정합니다. 우리는 '적법한 단어들'로 사유합니다. 거기에 따라오는 금기와 허용은 인간 문명의 근원입니다. '특별육'을 먹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것과 섹스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금기를 범하는 순간 사람마저 '특별육'이라는 존재로 격하되어 도살장에 넘겨집니다. 금기가 만들어내는 혐오의 근원은 차이입니다. 이 차이에서 인간의 도덕률은 탄생합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면,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말과 생각은 필요 없습니다. 질서 지움과 서열매김은 인간의 원죄이며 '보는 나'와 '말하는 나' 사이의 그 간극이야말로 인간이 '생각'이라고 일컫는 것의 전부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 '생각'이라는 사회규범에 가끔 적응하지 못합니다. 아니 항상 적응하지 못합니다. 보는 것, 경험하는 개인과 말하는 것, 이야기하는 개인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부적응의 정도에 따라 마르코스의 아버지처럼 언어를 잃어버리거나 마르코스처럼 속에 명치에 돌덩이를 품고 살던가,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명치에 불을 가득 채우고 살아갑니다. 마르코스의 여동생처럼 훌륭하게 적응하는 개인이 대부분일 테지만요. 이러한 인간 문명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작가의 집요함을 생각해 본다면 이 소설을 자본주의, 공장형 축산, 계층화, 돌봄, 환경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전시적 비판으로 읽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독해로 보입니다. 질 들뢰즈의 말처럼 내가 보는 것과 사회가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러한 존재의 불일치, 모순에 대한 작가 나름의 결론일 것입니다.
작가는 일종의 '서술트릭'을 사용합니다. 줄곧 마르코스의 '보는 것'에 대해 초점화합니다. 특히 재스민을 대하는 마르코스의 태도에 대한 독해를 독자들이 오해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합니다. 소설의 끝에서 드디어 마르코스의 '말하기'가 나옵니다.
'이건 인간의 모습을 한 가축일 뿐이야.' (p.299)
가축인 재스민에게 한 말이 아니라 인간인 세실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불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쓰여진 것'을 통해서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말하기'가 아닙니다. '쓰기'입니다. 동물도 울부짖음으로 서로 의사를 소통합니다. 쓰지 못할 뿐입니다. '말하기'는 일시적이지만 '쓰기'는 영속적입니다. '쓰기'를 통해 보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의 불일치에 대한 증거가 남습니다.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은 올챙이들'(p.267)의 냄새, '서로 겹쳐져 쌓이고 썩어 고약한 냄새로 공기를 오염'(p.263)시키는 순간이 쓰기를 통해 사라지지 않고 박제됩니다. 이런 교묘한 서술트릭 앞에 독자는 속고 자신의 근원, 내부의 불일치를 되돌아봅니다. 마르코스가 재스민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보았다는 '이야기'로 이 소설을 다시 봅니다. 세실리아의 아기는 죽었습니다. 재스민은 새로운 아기를 낳았습니다. 결말에서 세실리아는 재스민의 살아있는 아기를 가져옵니다.
정 : 세실리아 - (죽은 아기) 반 : (재스민) - 살아있는 아기 합 :세실리아 - 살아있는 아기
죽은 아기와 재스민은 둘 다 '인간'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아기는 마르코스가 가축과 성교한다는 금기의 산물이고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아기는 세실리아라는 어머니를 얻고 나서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가축과의 성교라는 금기는 가족애를 통해 다시 정상화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튀는 장면은 그 중간에 나옵니다. 마르코스가 가축과 성교했다는 사회적 금기에 역겨워하던 세실리아는 아기를 보자마자 돌변합니다. 이건 인간의 가장 밑바닥, 어떤 짐승적인 부분입니다. 사회 규범, 생각을 뛰어넘은 인간이라는 짐승, 어머니가 거기 있습니다. 그전까지 줄곧 사회규범에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뤘다면 이 장면을 그것을 뛰어넘는, 문제 자체를 부서뜨리는 '모성애'라는 무시무시한 어떤 것을 제시합니다. 여기에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를 깔아뭉개는 균열이 생깁니다. 그 균열은 행복하다거나 절망적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짐승으로서의 인간은 그러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균열은 마르코스에 의해 곧 봉합됩니다.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재스민을 때려죽입니다. 그 과정에서 재스민의 귀에 '언어'가 아닌 '서머타임'의 멜로디를 불러주며 소통합니다. 소설 앞부분에 도살장에서 일하는 세르히오는 '특별육'을 죽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가축과 인간은 언어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성교로 무너졌던 인간과 가축 사이의 구별 짓기는 여기서 복원됩니다. 소설은 마르코스와 세실리아, 아기라는 행복한 가족으로 마무리합니다. 사회적 금기는 어머니-아버지-아기라는 사회적 규범으로 다시 복원됩니다. '균열'은 보였다가 바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계속 이대로 그러할까요? 작가는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아주 희미한 빛은, 나타나자마자 사라진다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런 부드러운 기만에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기를 생산하지 않는 비혼주의나 딩크족이 정답일까요?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까요? 그런 표면적인 질문-대답으로 도피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이 소설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