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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개츠비
    서평 2025. 5. 12. 10:07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과대평가된 범작과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습니다. 아마도 삼각관계 위주의 통속적 외양이 범작이라는 평가의 이유 같습니다. 반대로 위대하다는 평가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곱씹어보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가 개츠비에 대해 위대하다고 수식한 이유는 녹색(green)에 대한 경이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 같습니다.
     
    ‘달이 더 높이 솟아오르자 무의미한 집들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한때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앞에서 꽃처럼 피어났던 그 옛날의 섬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신세계의 싱싱한 초록빛 젖가슴이었다.’
    ‘일시적인 매혹의 한순간, 인간은 이 대륙의 존재 앞에서, 역사상 마지막으로 극한의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 직면해서, 이해하지도 못했고 욕망하지도 않았던 어떤 심미적 명상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들며 숨을 죽였을 것이다.’
     
    그 옛날 미국에 처음 닿았던 백인 선조들은 신록으로 우거진 롱아일랜드를 경이감으로 대했습니다. 녹색으로 우거진 신대륙을 처음 보는 순간, 롱아일랜드의 타원형으로 솟아오른 신록의 젖가슴을 보는 순간의 불가지의 어떤 심미적 명상에 빠져 들었을 것입니다. 유럽의 꽉 짜인 계층적 사회 질서에서 벗어난 어떤 희망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을 거쳐 이 글의 배경인 1920년대에는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공화국의 검은 대지가 어둠 아래 굽이치는 도시 너머 저 광대한 어둠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젖가슴으로 말해졌던 타원형의 두 반도는 동쪽 알(이스트 에그)과 서쪽 알(웨스트 에그)이라는 두개의 달걀로 변해갑니다. 초록색 젖가슴에서 검은색 불알로. 여성적인 풍요로움에서 남성적인 불모로. 프런티어 정신에서 배금주의로. 젖줄기는 끊어지고 그 옛날 싱그러운 나무들은 저택 재료로 쓰입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그런 불모의 땅에서도 초록색 젖가슴을 볼 수 있는 사람인 겁니다. 작가는 그 점을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츠비는 내가 마음으로부터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개성이라고 하는 것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어떤 화려한 면, 만육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지진을 기록하는 정교한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느끼는 고양된 감수성 같은 것이 있었다.’
     
    ‘개츠비는 초록색 불빛을, 매년 우리 앞에서 멀어져 가는 축제의 미래를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물살을 거스르는 배처럼, 쉼 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
     
    책의 첫 부분에서 닉은 개츠비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 점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축제의 미래는 원문의 the orgastic future의 번역입니다. 개츠비는 검은 대지에 물들어버린 다른 사람들, 예컨대 톰, 데이지, 조던과는 달리 지금의 쇠락해 버린 미국에서도 경이와 희망에 찼던 미국의 초창기 정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미래로 인식합니다. 여성의 젖가슴에 대해 순수하게 오르가슴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쉼 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나아가는 그런 인간입니다.
     
    ‘개츠비는 말을 끊고 과일 껍질, 버려진 선물과 으깨진 꽃들이 널려 있는 황량한 길 위를 이리저리 배회했다. “나 같으면 데이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가 외쳤다. “당연히 그럴 수 있지요!”’
     
    개츠비, 그 혼자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과거를 바꿀 수 있다 믿습니다. 화자인 닉 캐러웨이 역시 개츠비를 겪고 나서야 어떤 위대함을 깨닫습니다. 달이 솟은 밤, 그 나무들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집들이 사라지는 순간, 옛날 초록색 대지의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건물의 재료로 쓰여진 흔적들이 사라진 밤에 다다라서 개츠비처럼 초록색 젖가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패배한 개처럼 고향인 서부로 다시 돌아갑니다. 글 첫 부분에 닉이 키웠지만 야생으로 도망친 그 개처럼요. 만약 서부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검은 대지에 길들여진 애완견이 되었을 겁니다. 혹은 톰 뷰캐넌처럼 개 목줄과 개 사료통을 사서 다른 사람을 애완견처럼 대할지도 모르지요.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다. 그때 이후 나는 그 충고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누구를 비판하고 싶으면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다 너만큼 혜택을 받고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나는 톰과 악수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다. 갑자기 어린아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주 목걸이를 사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커프스단추를 사려는 것인지 그는 보석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나의 촌스런 도덕적 결벽성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다.’
     
    닉 캐러웨이가 이 글의 화자라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여기에 있습니다. 촌스런 도덕적 결벽성은 원문에서는 ‘my provincial squeamishness’ 입니다. 지역적(provincial)인, 즉 서부의 정신을 화자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쇠락해 버린 동부의 뉴욕과는 다르게 서부의 오하이오는 초창기 미국 이주민의 그 경이감을 아직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배금주의에 물들지 않은 서부의 지리적 장점이 ‘혜택’입니다. 그 혜택 때문에 이미 검은 공화국에 물들어 있는 톰에 대해서도 비판하지 않고 관용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톰은 닉의 내부의 도덕적 결벽성에서 영원히 제거되었습니다(rid of my provincial squeamishness forever). 이 소설은 ‘든든한 바윗돌이나 젖은 습지 위에 토대’를 둔 지리적 환유(metonymy)가 중심인 소설인 셈입니다. 비록 개츠비는 죽고 닉은 도망쳐 나온 개가 되었지만 어떤 종류의 손에 잡히지 않을 위대함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그것이 ‘하남자’이든 ‘순수함’이든 1920년대 이후의 미국에서는 이질적인 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진중 문고로 배포되어 받은 미국 군인들은 이런 ‘옛 미국의 위대함의 귀환’을 그린 이 작품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에게 실존주의적인 고민이 다가오는 순간 이 소설은 과대평가된 범작에서 위대함을 품은 걸작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개츠비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요.
     
    그럼에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 인간은 ‘사랑’에 대해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는 듯 보입니다. 닉은 톰에게 발휘되었던 관용을 조던에게는 베풀지 못합니다.
     
    '"미숙한 운전자는 다른 미숙한 운전자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음, 제가 또 다른 미숙한 운전자를 만난 거 아닌가요? 제 말은 제가 부주의해서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거죠. 저는 캐러웨이 씨가 비교적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캐러웨이 씨의 비밀스런 자부심이라 생각했던 거죠.” “내 나이가 서른입니다.” 내가 말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기에는 다섯 살이나 더 많아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도 나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너무너무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는 돌아섰다. '
     
    조던은 자신이 ‘미숙한 운전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닉은 그녀 자신과 달리 도덕적인 부분이 있다고 인지합니다. 자신과는 달리 당신은 성숙한 사람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건 아픈 고백입니다. 그것에 대해 닉은 그녀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합니다. 상대방의 진심에 대해 절반의 사랑과 더 큰 절반의 후회를 남기며 매몰차게 돌아섭니다. 사랑하기에 상처를 줍니다. 따지고보면 개츠비 역시 그러합니다.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해 매달리는 것과 닉이 조던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부분 같습니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녹색’의 근본입니다. 그 색깔이 모든 경멸스런 부분을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함을 만듭니다. 이 소설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이 개츠비와 닉의 내부에서 틈과 균열을 만듭니다. 결국 남자는 롱아일랜드에서 잃어버린 젖가슴을 상상하는 것처럼 여성적인 어떤 이상향을 찾아 헤매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여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야 어린아이가 되고, 어려진 눈으로 세상에 대한 경이감을 회복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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