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와 사오(市川 沙央)의 ‘헌치백’을 읽었습니다. 헌치백은 영어 단어인 Hunchback에서 따온 제목으로 '곱사등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이자와 샤카’는 선천적으로 ‘근세관성 근병증’을 타고 났습니다. 등뼈가 심하게 S자로 휘고 목에는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행히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으로 요양 그룹홈 건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장애인과 간병인 말고는 만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통신 대학에 등록하여 학위를 취득 중이지만, 독백처럼 ‘학력 세탁’에 불과하고 나이 마흔에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돈을 지불하여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짓일 뿐입니다. 거의 왼종일 18금 웹소설을 연재하고 야한 기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갑니다. 번 돈은 모두 기부하고요, SNS 부계정에 남들은 모르게 ‘고급창부가 되고 싶다’,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라고 적습니다. 이런 그녀의 비밀을 간병인인 ’다나카 준’에게 들키면서 모든 일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당사자 소설’입니다. 소설의 실제 작가인 이지카와 사오 역시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척추가 심하게 휜 상태라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20년 넘게 라이트 노벨, SF 를 쓰고 응모해 왔습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처음으로 쓴 순문학이 이 ‘헌치백’입니다. 2023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매체의 인터뷰에서 나를 떨어뜨린 SF, 라이트 노벨 출판사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분노를 심어주었고 그것으로 이 소설을 잉태할 수 있었다고요. 역설적인 위트입니다. 작품이 나온 맥락을 알고 소설을 읽으면 장애인에게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용어대로 일본이라는 사회가 작가에게 ’베리어프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p.37)
’박물관이든 도서관이든 보존되는 역사적 건조물이 나는 싫다. 완성된 모습으로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오래된 것이 싫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낡아가는 데 가치가 있는 것들이 싫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 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p.61)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잘못된 설계도’로 태어난 태생에 대한 분노가 책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아쿠타가와 상의 심사위원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책이 우리에게 들이미는 질문의 기백(気魄)은 독자에게 안이한 대답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평했습니다. 장애인인 당사자가 써 낸 장애인 소설이라는 압박감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크게 3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페이지 11 ~ 페이지15, 프리라이터 미키오의 헤프닝바 잠입 리포트 페이지 15 ~ 페이지 96, 장애인 이자와 샤카가 간병인인 다나카 쥰에게 비밀 계정을 들킨 이야기 페이지 97 ~ 페이지 107, 와세녀S 의 체험담
대부분 분량은 두번째 파트인 이자와 샤카의 이야기입니다. 두번째 파트를 앞 뒤로 감싸는 처음과 끝의 이야기들은 조금 외설적인 내용입니다. 앞 부분의 헤프닝바는 커플끼리 스와핑 내용이고 뒷 부분의 와세녀S는 여성 화자가 고급 창부로 일하는 내용입니다. 앞과 뒤의 내용은 이자와 샤카의 창작입니다. 프리라이터 미키오의 리포트는 잡지사 기사 아르바이트, 뒤의 내용은 18금 소설 사이트에 투고한 '와세녀S의 난교일기' 입니다.
‘연꽃 주위의 진흙탕처럼 질퍽한 실을 그리는, 늪에서 태어나는 말들, 하지만 진흙탕이 없으면 연꽃은 살아갈 수 없다.’ (p.67)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진흙탕은 프리라이터 미키오와 와세녀S, 연꽃은 샤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의 외설적인 진흙탕에 이자와 샤카를 연꽃으로 끼워넣습니다. ‘샤카’는 석가(釋迦)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작가는 진흙탕 위에 피어난 연꽃이라는 비유를 통해 이자와 샤카를 부처, 석가모니로 비유합니다. 책 후반부에 나오는 ‘열반’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설정을 뒷받침합니다.
‘옆방의 그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열반이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p.94)
샤카 옆방의 여성 역시 비슷한 근 질환 장애인입니다. 침대 위 이동식 변기에 볼일을 보고 주방 근처 간병인에게 손뼉으로 신호를 보내 뒤처리를 부탁합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죽음을 선택할거야’라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라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행위, 그것이야 말로 열반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쳤다면 이 책은 그저 모범적인 ‘장애인 소설’ 이었을 것입니다. 주인공인 이자와 샤카는 그런 '깨달음'에 저항합니다. 이 소설은 그 지점부터 진정으로 시작합니다.
‘열반의 샤카는 죽을 둥 살 둥 침대에서 일어나고 매일매일 아무리 숨 쉬기가 힘들어도 밤이 될 때까지 데스크에 앉아서 버틴다. 종이책을 증오하면서도 종이책에 달라붙어 끝까지 읽는다.’ (p.93)
그녀는 ‘열반’을 거부하고 평범한 ‘자아’를 열망합니다. 마치스모적인 책읽기를 혐오하면서도 죽을 둥 살 둥 데스크에 붙어 읽어나갑니다. 그런 그녀의 궁극적인 저항, 평범함을 성취해 내는 방법이 바로 '임신'입니다. 하지만 임신을 해도 몸의 구조상 출산하지 못합니다. 중절을 택하겠다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보통의 평범한 여성들도 산전 기형아 검사로 태아의 장애가 판명되면 중절하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여성이 기형의 태아를 중절하는 것이 평범하다면 기형의 여성이 정상적인 태아를 중절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겠습니까. 기형적인 논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간절함과 진실이 있습니다.
'장애인은 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회가 만든 그 정의에 나는 동의했다.' (p.63)
이자와 샤카는 태어난 설계도 부터 성적으로 거세된 부처님입니다. 동시에 속으로 질척질척한 사바세계의 '진흙탕'을 갈망합니다. SNS의 비밀 계정으로 '고급창부가 되고 싶다, 육체의 마찰로 돈을 벌고 싶다, 임신하고 중절하고 싶다'고 토해냅니다.이런 마치스모적인, 평범함에 대한 갈망을 비밀계정 이라는 진흙탕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흙탕을 다나카 쥰에게 들킵니다. 그녀는 어쩌면 마음 속 깊이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채고 경멸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요?
‘짜증이나 멸시라는 건 너무 멀리 동떨어진 것에는 던지지 않는 법이다’ (p.44)
동정보다는 차라리 혐오를 원합니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으로 보아주기를 원합니다. 이런 그녀에게 다나카 쥰은 일종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드물게도 다나카 씨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읽혔다. 상대를 철저히 바보로 만들어 경멸하고 싶어 하는 감정이.’ (p.70)
다나카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단순히 그녀를 경멸했을까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은 ‘이자와 샤카’라는 여성은 성인 소설과 잡지 기사라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푼돈을 벌고 전부 기부합니다. 다나카에게 그런 그녀는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약자가 괜히 무리할 거 없잖습니까. 돈 좀 있다고.’ (p.41) ’나도 약자예요. 그러니까 귀찮은 일거리 늘리지 말아주십쇼.’ (p.42)
장애인인 그녀의 앞에서 다나카 자신도 ‘약자’라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멸시하듯 그녀를 내려봅니다. 다나카는 그녀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그의 반응에 샤카는 다나카에 대해 ‘인셀인가?’라고 속으로 되묻습니다.
‘내 마음속에 잡힌 주름이 얼굴 이모티콘처럼 몇 개의 선으로 모여 옅은 웃음을 형성했다.’ (p.42)
그녀에게 그의 멸시는 ‘불쾌’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옅은 웃음이 나왔을 겁니다. 자신을 ‘40대 미혼 장애인 여성’이 아닌 '이자와 샤카'로 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다나카에게 1억 5천 5백만엔을 제시하며 자신을 임신시켜 달라고 합니다. 돈을 통해서 '강자'로서 다나카의 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다나카 씨의 르상티망이 내 폐 안에서 염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p.84)
'마음도, 피부도, 점막도 타자와의 마찰을 경험한 적이 없'던 샤카는 그와의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죽음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소설은 겉으로는 두 남녀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없습니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성적으로 팽팽한 긴장감과 교차하는 경멸입니다. 하지만 명백히, 둘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연애 따위, 사랑 따위 거창한게 아닌 겁니다. 장애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고요. 이 소설은 그저 사랑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고 그저 ‘큭큭큭 웃어달라’고 말합니다.
'다나카 씨는 돈에 대한 것만 생각하세요.' (p.89) '나는 미워해도 괜찮으니까.' (p.90)
이런 한류 드라마 같은 대사에 약간 마음 아파하다 피식 웃으면 되는 겁니다. 거듭 읽을수록 그게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무거운 질문에 꼭 무겁게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귀를 기울이면 새어 나오는 부드러운 한국어 노랫소리, 연애의 성취를 향해 멜로디가 점차로 고조되어 간다. 입원 중에 시간이 남아돌아 텔레비전을 켜놓는 습관이 붙어버린 나는 리모컨을 찾으려고 데스크 서랍을 열었다. 텔레비전은 켜지지 않았다.’ (p.94)
결국 둘의 연애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연민이라는 올바른 거리감’ 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절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르상티망을 부딪혀 볼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은 남았으니까요. 저는 이 작품을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일말의 호감을 가졌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라는 레테르를 뗀, 인간 대 인간의 조금 웃기고 씁쓸한 사랑의 헤프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