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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물농장 - 조지 오웰서평 2023. 7. 13. 19:20
조지 오웰의 작품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기준으로 전반기, 후반기로 나뉜다고 본다. 전반기의 작품들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같은 몸으로 겪은 르포르타쥬들이 중심이다.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고 관찰한 결과물들이다. 그 과정에서 막연하게 느꼈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사색하고 생각이 단단해지는 과정을 쓴 것이 '카탈로니아 찬가'다. 책의 초반부를 보면 조지 오웰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에 대해 작가 자신이 고백한다. 좌파 내부의 스페인의 자생적 노동조합 사회주의와 소련에서 건너온 스탈린주의의 대립에 대해 '같은 편인데 왜 싸우지?' 정도의 인식을 가졌을 정도다. 초소 밑바닥을 뒹굴어가면서 서서히 둘의 차이를 깨닫고 깊이 사색하면서 작가는 스스로 변화한다. 영국으로 돌아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영국 신문들을 긁어 모아서 읽어가며 스스로를 이념화한다. 진실과 왜곡의 경계선 위에서 '사회주의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 다음으로 쓰여진 '동물농장'은 그 성과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언어로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이 소설이 오늘날까지 스테디셀러로 남아 있는 이유는 그런 장점들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동물농장' 서사 자체의 알레고리는 쉽게 파악이 가능한데 그런 장치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유추하기가 약간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의 해석을 위해서는 이 책의 '동물주의'를 '공산주의-스탈린주의'에 대한 단순한 알레고리로 읽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야 한다.
독해의 실마리는 까마귀로 등장하는 '모제스'다. 영어로 모제스(Moses)는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Moses)와 동일 단어다. 까마귀 '모제스'는 당연히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의 메타포다. '까마귀 모세'가 설파하는 '설탕캔디 산'은 낙원, 더 나아가 '성경의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오는 '시나이 산'을 의미할 것이다. 까마귀의 이야기들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은유이고, 작 중의 '동물주의'로 비유되는 현실의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구도로 그렸다고도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이라 비판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작 중 '모세'에 관련된 은유를 뜯어보면 좀 더 꼬여있다.
'스노볼은 무척 힘들게 (돼지가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다리 위로 올라가 일을 시작했고'
이 발췌는 스노볼이 동물주의 '칠계명'을 적는 장면이다. 성경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 '야훼' 신에게 십계명을 받는 장면과 겹친다. 그 점이 더욱 부각되는 부분은 사다리 위로 올라가 균형을 잡는게 힘들다는 묘사인데 이것은 모세가 받은 첫번째 돌판의 깨어짐과 유사하다. 모세가 첫번째 돌판을 깨뜨리며 유대인들에게 몸의 장식품을 모두 없애라고 한 것은 스노볼이 기존의 동물들이 '인간'이라는 우상에게서 받았던 '리본' 장식품들을 불태우는 묘사와 일치힌다. 그렇다면 까마귀인 모제스 뿐만 아니라 돼지인 스노볼 역시 '모세'의 은유일 것이다.
다시 전체적인 구도를 보면 '동물주의'의 성립을 모세에 의한 '유대교'의 탄생으로 풀어 썼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모세 이후 2000년의 서양문명은 모세의 그늘 아래 존재했다. 유대인의 유일신교는 모세교였고 이후 로마 제국 아래에서 세계의 보편 종교로 변화하였다. 현재의 역사의 위계에서 서양의 주도권은 부정할 수 없다. 서양문명의 근원은 유대인의 유산인 '유일신교'다. 동물농장은 단순히 스탈린 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서양 문명의 인간 구원의 기획에 대한 고찰로 읽힌다. 이런 해석에 도움을 주는 텍스트로 1938년 프로이트의 유작으로 나온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아닐까 한다. 총 3개의 연작 논문으로 모세는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다는 대담한 가정에서 시작하여 유대인의 유일신교 성립과정, 유대교가 보편종교로 변화하면서 행해진 유대인 차별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동물농장'의 서사의 상당 부분은 이 프로이트 논문과 통한다. 글이 난잡해질것 같지만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목적의 서평이라 변명하며 조금 길게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논문은 모세가 유대인이 아닐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유일신교는 원래 유대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가 발상지다. 이집트라는 지방 국가가 다른 문화권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보편 종교에 대한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기획된 것이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의 전환이었다. 당시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였던 아메노피스 6세는 태양신 '아텐'을 유일신으로 올리려고 시도한다. 역사상 이집트의 유일신교는 기존 제사장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파라오의 죽음과 동시에 이집트는 다신교로 회귀한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유일신교를 주장하던 파라오의 측근이었던 '모셰'(Mosheh)라는 이집트인이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영웅인 '모세'(Moses)였다고 과감하게 가정한다. 파라오의 죽음으로 아텐교가 박해받는 과정에서 측근이었던 이집트인 모세가 노예였던 '셈족'을 데리고 '출애굽'하였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세를 따라나온 이집트인 추종자 집단이 이후 유대교의 제사장 계급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의 기원이었다고 주장한다. 노예 민족에게 유일신교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주인 이집트 민족의 습속이었던 '할례'가 유대인에게 전해진다. 지도자인 이집트인 모셰가 유대인에게 특권을 내린 것이다. 할례는 지도자였던 모세라는 '아버지'에게서 부여받은 특권으로 유대인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정신적 증거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섬뜩한 가정을 더하는데 출애굽의 과정에서 반항적인 노예종족인 셈족이 '모셰'라는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아버지 살해, 축출의 경험이 유대인의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진단하고, 그런 죄악의 무의식이 세월을 넘어 유일신교로 분출했다고 말한다. 유대인이 내면화한 '모셰'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서사가 서양문명을 결정 지은 것이다.
출애굽한 셈족은 리디아의 카데스에서 친연 종족인 다른 부족과 합류한다. 부족 융합의 과정에서 셈족의 원래 신인 '일로힘'과 시나이 산의 화산신 '야훼'가 대결하였고, 카데스 민족의 신화가 승리하여 야훼'라는 이름의 신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한다. 출애굽한 노예 종족의 신이 카데스의 신에게 흡수당한 것이다. 카데스의 유대인 종족에게도 '이집트인 모세'에 해당하는 '야훼교'의 종교적 지도자가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이 두 민족의 기자(記者)들이 두 '모세'를 섞어 묘사한 것이다. 엄격한 성격의 '이집트인 모세', 자상한 성격의 '카데스의 모세'가 섞인 것이다. 모세 5경 내에서 그런 성격의 불일치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이집트의 유대인과 카데스의 유대인, 두 민족 사이의 타협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 논문의 이런 설명들은 '동물농장'의 여러 서사들과 상당부분 닮았다. 동물들은 모두 평등하나 일부 동물, 즉 '돼지'는 더 평등했다. 그 평등한 일부 동물에서도 스노볼과 나폴레옹만이 생식이 가능한 '종돈'으로 최고로 평등한 존재다. 종돈으로서의 '번식'의 특권은 '할례'의 특권을 연상시킨다. 성경에서도 이민족과 유대인의 결합에 '할례'를 조건으로 거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폴레옹을 인간과 차이가 없다고 묘사한다. 성경의 모세는 노예인 '유대인'이 아닌 주인인 '이집트인'이었으며 동물농장의 나폴레옹도 실제 '동물'이 아닌 '인간'이었다. 나폴레옹과 스노볼, 둘 다 모세의 메타포다. 칠계명을 부여한 스노볼은 이집트인 모셰(Mosheh)이며, 단독으로 지도자가 된 나폴레옹은 카데스의 모세(Moses)에 해당할 것이다. 사다리에 위태롭게 올라가 '칠계명'을 썼던 스노볼의 축출과 나폴레옹의 단독 독재는 '일로힘교'와 '야훼교'의 대결에서 '야훼교'가 승리한 서사와 일치한다. 이런 과정에서 '동물주의' 자체에 아버지 살해의 성격을 부여한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 살해'라는 태고의 신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인간 원초적 죄의식이다. 유대인은 여기에 더해서 '모세 살해'라는 죄를 더한 민족이다. 아버지 살해를 두번 저지른 민족이다. 한 때 사라졌었던 이집트의 '유일신교'가 유대인을 통해 부활한 이유는 이런 거듭된 아버지 살해의 트라우마에서 기원한다.
책 속의 '동물주의'도 이런 과정을 겪는다. 동물들의 '번식'을 결정하는 주인인 존스를 쫓아내고, 칠계명을 전해주었던 스노볼을 또 한번 쫓아낸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계속 경고한다. 존스와 스노볼은 부활할 것이고 동물농장을 노리고 있다고. 그 과정에서 원래의 지도자, 존스와 스노볼은 동물 농장 내부에서 개념적 '악'(惡)으로 타자(他者)화된다. '동물주의'라는 상상의 질서의 모순점들을 악의 타자화를 통해 은폐하고 봉합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폴레옹은 개념적 '선'(善)으로 떠받들여진다. 그런 과정에서 나폴레옹과 일반 동물들 사이에 점점 물리적, 정신적 거리가 벌어진다. 그 거리를 메우는 것은 화려한 '의식'이다. 풍차 전쟁이후 훈장을 만들어 수여하고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하며 많은 축포를 쏘았다'. 이 부분은 프로이트 논문의 마지막 부분과 겹친다. 유대교에서 로마 제국의 보편 종교인 기독교로 변화할때 신과 인간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 멀어진 거리는 '문자'와 '제의'로 채웠다. 나폴레옹은 '동물주의'에 재빨리 기존 '인간주의'의 '계급'을 도입한다. '동물주의'는 보편적이고 자비롭게 변했다. '동물주의'는 다시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주의'로 근접한다.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한 것이다. 실제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기획은 현실에 부딪히고 깎여서 적과 같이 권위주의로 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스탈린은 실제 역사적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의 조국인 프랑스와 은근히 공모했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도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인간주의의 계급적 '평등'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스노볼'은 나폴레옹에게 쫓겨나고 동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이트의 논문에서는 이런 과정을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증오의 원인으로 설명한다. 유대교에서 보편적 종교로 변화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중해의 다른 민족들은 하느님의 아들의 자기 희생을 통한 '원죄'의 죄사함의 관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대 민족은 자신의 하느님을 버리지 못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는 인정하고 그 죄를 벗었지만, 놈들은 저희들이 하느님을 살해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아버지를 살해하고도 반성하지 않은 개념적 악이며 희생양이다. '스노볼'은 유대인의 은유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밖에서 동물 농장을 위협하는 '스노볼의 음모들'은 유대인의 세계지배에 관한 시온 의정서의 재현이다. 물론 이것들은 거짓이다. 하지만 '모세' 조차 사실은 거짓이지 않은가. '역사'에 영향을 준 것은 모세의 실체적 진실이 아닌 기억의 흔적이었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기억'은 이후 2000년간 인간들에게 '설탕캔디산'을 약속해 왔다.
조지 오웰은 단순히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고 있는 기획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흔히 소개하는대로 이 소설이 공산주의-스탈린주의 성립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시 질문을 바꾸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공산주의' 밑에서도 모세가 사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산주의는 여전히 기존의 유일신교 사상의 그늘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질문은 이렇게 확대된다. 기독교든 공산주의든 인간이 사회를 바꾸려하는 모든 '상상의 질서'는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 과연 그런 혁명의 기획들이 가능은 한 것인가. 공산주의에서도 실패했다면 그것은 인간 행위(agency)의 한계 때문인것이 아닌가. 구조(structure) 밑의 인간은 그저 무력할 뿐인가. 역사는 좌절의 기록인가.
책의 결론대로라면 개인이 머리가 좋아봤자 당나귀처럼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냉소할 수 밖에 없다. 동물농장과 같은 시기에 쓰여진 '코끼리를 쏘다'라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에서도 그런 흔적이 보인다. 버마에서 경찰관을 하던 시기의 조지 오웰이 난동을 부리던 코끼리를 죽였던 이야기다. 그는 제국주의의 경찰관이었던 자신을 혐오했고 코끼리를 발견하자 쏴서 죽이면 안된다는 확신을 품는다. 하지만 이미 그 뒤에는 버마인 2000명이 그가 코끼리를 쏴 죽일 것이라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러디아드 키플링'적인 '백인의 의무'를 외면하지 못했던 작가는 방아쇠를 당긴다. 개인은 사회의 구조(structure)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상황에 맞춰 행위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파악한 인간 지성의 한계는 명확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 농장주는 '동물'인 돼지 농장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하층 동물들과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대로 싸워야 할 하층 계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과 '동물' 모두 계급 아래에서 평화롭다. 인간은 뇌의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인간 관계를 미리 준비된 '상황 정의(定意)'에 맞춘다. 그 모든 행위의 여러 갈림길은 서로간의 계급이라는 편한 결론을 향한다. 인간은 -동물마저도 두뇌로 사고한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이성의 한계일 뿐이다. 코끼리에게 방아쇠를 당긴 조지 오웰은 평생 무력감에 시달렸다. 파리와 런던의 부랑자 생활도 그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1984'에서 절정을 이룬다. '동물농장'이 '사회의 실패'였다면 '1984'는 실패한 사회에 사로잡힌 출구없는 '개인의 절망'이다.
이런 사고(思考)들은 결국 작품 속에서 '까마귀'인 모세로 집중된다. 인간 농장주인 존스의 밑에서 먹을 것을 얻어먹다가 '동물주의' 혁명 이후 돼지 밑에서 먹을 것을 얻어 먹는다. 작품 끝까지 여전하게 '설탕캔디산'을 동물들에게 이야기한다. 까마귀는 우리 머리 위를 비웃으며 날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까마귀에 대한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까마귀는 사라지지 않는다'이다.
나는 이 소설에 반대한다. 전체적으로 공산주의를 기독교적 알레고리를 통해 해부하며 결국 같은 실패를 범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잘난 사회적 기획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위계 질서라는 한계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진단한다. 인간의 이성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찬성할 수 없다.
동시에 읽기를 추천한다. 까마귀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대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마르쿠제나 니체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성들의 더욱 최신의 대답들도 준비되어 있다. 혹은, 대답을 회피하고 '지금'을 긍정하며 질문 자체가 의미없다고 애써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대답들 모두 우리가 밟고 서 있는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좋은 소설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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