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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서평 2023. 5. 25. 20:15
에리히 프롬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의 공통적인 정서는 ‘절망’이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같이 죽었고, 1940년대 유대인들은 쥐같이 죽었다. 한나 아렌트의 일갈처럼 쥐들 중 똑똑한 인텔리겐챠들만 자유를 향해 도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식은 원죄이며 인간의 본질은 야만이다. 홉스와 다윈과 프로이트의 상보적 결합은 절망적으로 견고하다. 이성은 거기서 다만 ‘해석’할 뿐이다. 마르크스의 ‘1884년 경제학 철학 수고’는 그런 해석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현대’였던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 스탈린식 사회주의, 미국의 자본주의는 초기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즉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물품의 교환은 인간마저 교환의 대상으로 만든다. 존재는 소외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프름과 다른 동료들은 지적으로 갈라선다.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에리히 프롬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이 책은 희망을 보겠다는 다짐이다.
1장에서 사랑은 기술이자 능력이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숙달시켜야 하는 대상이라 주장한다. 2장의 이론에서 인간의 역사를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그 합일의 방법으로는 사랑을 제시한다. 3장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었는지를 진단하고 현대 사회에 사는 인간이 어떤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검토한다. 4장 ‘사랑의 실천’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의 실천 방법을 이야기하고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대해 자문한다. 즉, 책의 핵심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사랑이 가능한지에 대한 실용적 검토다.
2장의 1절,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실존의 근본 문제를 자연과의 ‘분리 불안‘으로 진단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될 때 이성의 원죄를 짊어졌으며 죽음, 고독, 무력감에서 기인한 불안을 느낀다. 프롬은 이런 현상을 ‘인간 실존의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묘사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감옥에서 시작한다. 불안의 최초 해결책으로 토테미즘과 유인주의를 통해 ‘유아적 합일’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원초적 방법은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성적, 약물적 방법을 통한 ‘도취적 합일’이다. 이 방법 또한 일시적이라는 단점을 지닐 수 밖에 없고, 문화가 발달하고 집단이 확대될수록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단계는 ‘일치적 합일’이다. 전 단계들의 강요적 성격을 벗어나 자발적인 사회적 소속감을 특징으로 하는 지속적 합일이며 냉정하고 관계적인 특징을 보인다. 프롬은 이 역시 현대로 올수록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대 자본주의 이행의 사회과정 속에서 개인의 일치적 합일은 개성이 없어지는 동일성이 두드러진다. 이에 인간은 해결될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벗어나는 방법으로 노동, 오락, 창조적 작업 등이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소외로, 오락은 문화산업으로, 창조적 작업은 일시적 만족으로 좌절되기 때문에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서 프롬이 주장하는 다음 단계는 존재 간의 '사랑'을 통한 ‘대인적 합일’이다. 원초적 분리경험에서 시작한 인간의 역사는 ‘유아적 합일’, ‘도취적 합일’, ‘일치적 합일’로 변증법적으로 진행해 왔으며, 현재의 모순은 ‘대인적 합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예견한다.
2장의 2절 부모와 자식간이 사랑은 프롬의 인간 본질의 근본적 이론인 ‘자연 분리’에 대한 개인의 퍼스널리티적인 변주다. 인간은 공서적 '자아도취', '사물지각', '어머니, 아버지의 내면화'를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이 이론은 이후 2장 3절에 등장하는 신앙의 발달과정과 등치된다.
2장의 3절은 독해에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언뜻 보기에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해 수평적으로 나열힌 내용처럼 보인다. 뜯어서 보면 유기적으로 얽혀서 한가지 결론에 이른다.‘형제애’는 분량이 적으나 어쩌면 이 책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일수도 있다. ‘나’는 ‘타자’를 통해 세계, 다른 타자와 관계를 맺으므로 사랑의 가장 기본은 ‘형제애’라 정의한다. 이 부분은 프롬의 전체 철학의 핵심인 ‘인본주의’를 지탱하는 근원이다. 각 대상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변주이다.
'모성애'는 생리적 애정인 ‘젖’에서 존재 긍정의 ‘꿀’을 제대로 거치면 실존의 '분리'를 완성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분리 단계를 거친 성인은 성숙한 사랑이 가능하다.
'성애'는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하는 기만적인 특징이 있다. 인간 최초의 분리 경험은 어머니와의 육체적 분리이고 성애에서 제공하는 육체적 결합은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도 사랑으로 착각하게 한다. 프롬은 성애의 이런 특징을 통해 사랑의 비합리성에 대한 사고를 연역해 낸다. 성애가 특별한 개인간의 독특한 매력의 결실이므로 사랑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한 쉽게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사상은 그런 매력의 정체가 형제애를 기반으로 둔 감정이 아닌 허영심, 파괴욕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애를 개인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견해에서 도출되는, 어떠한 환경 밑에서도 관계가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도 개인의 인간성을 무시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사람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다른 감정이 아닌 ‘형제애’에서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성애야말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기애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사랑과 자기애의 배타적 관계를 탈피해서 사랑의 결합적 성격을 주장한다. 타자와 자아에 대한 태도는 같은 '성격'을 기반으로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과 남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그 지점에서 특별한 대상에 대한 사랑도 시작되는 것이다.
형제애에서 기반한 모성애, 성애, 자기애를 이론적으로 전제한 후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 챕터의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그 기본 뼈대를 제공한다. 종교의 발전의 기본은 인간 유아(乳兒)의 성장 과정과 유사하다.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애착이 옮겨 가듯 인간의 역사도 어머니 중심 종교에서 아버지 중심 종교로 변화한다. 부모의 사랑을 내면화해서 성숙한 인간이 깨어나듯, 종교 역시 신을 ‘타자’화 하여 선과 정의라는 인간 내면의 개념적 신으로 거듭난다. ‘인간은 오직 궁극적 실제의 부정적 측면을 알 뿐, 그 궁극적 측면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신론 또한 역설적 논리학과 헤겔과 마르크스적인 변증법적을 동원하여 유일신론과 공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도출한 '절대 타자'로서의 개념적 신과 서양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도구적 이성을 대립시킨다. 그런 도구적 이성은 원자탄을 낳았다. 그러므로 도구적 이성을 버리고 개념적 신에 대한 신앙으로 설명 가능한 '합리적 신비주의'를 주장한다. 인간 실존의 불안 문제에 대한 해답을 형제애에서 비롯한 사랑으로 제시하고 그 이론으로 인간 역사의 종교의 발달과 인간의 성장 단계를 대비시키며 선철학, 비유신론, 불가지론을 끌어와서 합리적 신비주의를 통한 '신앙'을 그 방편으로 삼는다.
프롬과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다른 동료들은 여기서 갈린다. 해결책으로 들고온 '사랑'과 '신앙'이라는 모럴을 어떻게 논리로 반박하겠는가. 프랑크프루트 학파와의 이별 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회의에서 프롬에 대해 인신공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논리적 토론이 성립하지 않으면 메신저를 때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절망 앞에서 절망하지 않겠다는 의지, 즉, 프롬 자신이 파악한 프롬은 ‘생산적’이다. 현대 사회는 병든 시장적 성격이고 그는 자신의 생산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불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빌려와 행동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프롬이, 내가, 우리가 ‘이성’이라는 원죄를 갚고 합일을 이루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논리를 버리고 신앙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다음은? 혁명의 대상인 사회를 해부할 차례다.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는 사회과학적이다. 프롬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심리학’적인 챕터다. 근대 자본주의가 현대 자본주의로 바뀌는 사회과정을 심리, 경제, 사상으로 나뉘어 살핀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요구하는 인간상을 책에서 조금 길게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을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이룩한 현대 자본주의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즉, 협동, 소비, 자유, 비폭력 같은 미덕으로 보이는 사회과정의 결과인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노동의 규격화로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망각하게 만들고 오락의 규격화로 무의식적인 절망을 극복하게 한다. 모든 것이,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프로이트적인 성욕과 설리반 적인 공정을 바탕에 둔 ‘사랑’은 병리적이다. ‘신’은 물신화되어 개인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기능한다. 중세는 ‘신의 원칙‘인 아버지적인 양심이 지배했던 여덟살 어린이 같은 사회였지만 현대는 ‘신인동형’의 어머니적인 양심이 지배하는 세살난 유아(乳兒)들의 세상이다. 우리 인간은 중세에서 현대로 넘어가면서 어린이에서 유아로 퇴화한 것이다. 자본주의 구조에 바탕을 둔 인간의 사회적 성격은 ‘시장적’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사회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고찰은 4장에서 나온다.
시장적 성격의 사회에서 개인은 생산적 성격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가. 마지막 장에서 프롬은 전제-접근-실용적 검토의 단계를 밟아가며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혼자 있기 훈련, 순간에의 몰두, 어린이의 마음으로 인내, 정신을 민감하게 단련하는 방법을 통해 겸손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를 통해 실존적, 합리적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생산성과 용기를 바탕에 둔 생산적 성격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전제-접근이다.
이 책의 진정한 의도는 그 뒤 ‘실용적 검토’에서 드러난다. 사회 구조가 개인을 규정한다면 병든 사회에서의 개인은 위의 방법으로 생산적 성격을 실천할 수 있는가. 파편화된 시장적 성격의 개인에게 ‘형제애‘라는게 가능한가.
‘현재의 사회제도가 무한히 계속되기를 기대할 수 있고, 동시에 형제애라는 이상 실현을 희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체제 및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예외이다’.
프롬의 의견 역시 힘들다는 쪽으로 기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적 성격을 변증법적으로 규명한 프롬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따라가면 절망 밖에 남지 않는다. 스스로의 이론에 뒤따르는 사랑의 불가능함이라는 ‘역사적 필연성‘(p.186)을 부정할 수 있는가. 다른 ‘급진적 사상가‘(p.185)는 이 논리로 프롬을 공격한다. 각주(p.192)를 따라가보면 그 급진적 사상가는 마르쿠제다. 프롬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결합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 학자다.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사상적 배경의 둘 사이가 멀어진 이유는 확연하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프롬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핵심을 뒤튼 궤변이다. 리비도를 부정하고 유아 시절의 관계 맺기로 그것을 대체한다. 그 위에 선철학, 실존주의, 유대교 등등의 온갖 잡탕을 뿌려 도덕적 신비주의를 제시한다. 이것은 학문도 뭣도 아니다.프롬은 이런 비판을 애써 부정한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상당한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구조라는 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 구조에 중요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개인의 생산적 성격을 배제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사랑의 기술'은 이 지점에서 생명력을 갖는다. 지금 정신분석은 실용으로 쓰이지 않고 마르크스를 비웃듯 자본주의의 시장적 성격은 더욱 더 견고하다. 선진국은 먹을게 남아돌아서 보관하는데 막대한 전기를 쓰고, 그것으로 바이오 연료로 만든다. 한국 사회의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득의 11.7%를 차지한다. 미국에서는 5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사회단체의 급식 보조가 없으면 굶주린다. 부조리하고 부조리하다. 왜 자원을 나누면 안되는가. 왜 사람들은 나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가. 옆의 개인의 작은 부조리에는 공감하면서 세계의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 사회 밑에서 이미 둔감해질대로 둔감해졌다. 개인은 시장적 성격에 사로잡혀 있다. 무력감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혹은, 활력 있는 척 속이며 유튜브 쇼츠를 보며 시집 대신에 '부의 추월차선'을 읽는다. 그렇지만, 그러므로, 프롬은 절망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에리히 프롬은 겸손과 이성으로 신앙을 가지고 담담히 자기 자신을 바꿔나가자고 이야기한다. 일단 행동하라고.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이 책의 범위 내에서는, 오직 암시될 수 있을 뿐'이지만 당신이 행동하면 사회를 바꿀 방법은 자기가 책으로 쓰겠다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대인 지식인들은 좌파 혁명의 실패로 대중에 대해 절망하고 홀로코스트에 앞장선 대중을 겪으며 이성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절망과 환멸의 결과는 '역사적 필연성'에 따른 '급진적 허무주의'다. 그럼에도 늙은 쥐 한마리, 프롬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단말마를 내지르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에 대한 기록이다. 쓸모없는 자기계발서고 낡은 이론의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을 걷어내어도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은 남지 않는가. '부조리에 느끼지 못하고 행동하지 않는 나'라는 깨달음도 같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티끌만한 형제애도 없고 모두 사랑의 죄인일 뿐이라는 그런 깨달음 말이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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