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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서평 2023. 6. 27. 20:23
1. 서론
이 책은 보통의 서평처럼 소개와 내용 요약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방대한 내용을 이미 잘 요약한 책이기에 그것을 더 압축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더해서 유튜브와 웹에 좋은 설명이 많이 나와 있다는 것도 이유다. 여기에서는 다른 설명 및 리뷰에서는 짚지 않았던 내용들을 적어보려 한다. '사피엔스'는 범위가 넓고 열려있는 텍스트이기에 여러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이 글이 그런 접근에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책의 가장 핵심은 현재의 사피엔스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관점이 '역사'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역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p.561)라고 주장한다. 그 역사를 풀어내는 방법은 '서사'(narrative)다. 우리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역사적 서사'를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서사'의 기본인 최소 이야기(minimal story)는 시간적 순서를 따른 '정태-동태-정태'다. 책 내부에서 그것을 '혁명 이전' - '혁명을 통한 상상의 질서' -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로 구조화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을 성서적 세계관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챕터 제목 부터 노골적이다. '지식의 나무'-'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대홍수'로 이어지는 챕터들은 인지혁명을 통한 인간의 번성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러므로 '인지혁명'은 명백한 '선악과'의 은유다. 즉, 이성은 '원죄'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원죄를 '상상의 질서'를 통한 인본주의로 구원받으려 한다. 그렇다면 결과는? 마지막 챕터 제목처럼 사피엔스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심판'이다. 이 책은 원죄-구원-심판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역사적 서사'로 인간의 현재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종말이 기다리는 미래를 말하려 한다.
2. 원죄
'이성'을 원죄로 보는 시각은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참신한 것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배움과 죄는 본디 하나다'고 말했고, 만년에는 그런 원죄의 결과를 과학으로 돌이킬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했다. 폰 노이만은 지금처럼 빠른 기술적 진보로 도달하게 되는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의 역사가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유발 하라리는 인지혁명이라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 사피엔스의 '인류세'(Anthropocene) 도래를 창세기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그 '인류세'의 결과는 어떠한가. 인지혁명으로 형제를 죽이고 거대 포유류를 절멸시켰다. 농업혁명으로 동물을 가축으로 만들어 고문하고 같은 인간끼리 계급을 만들어 착취했다. 인류통합의 과정에서 수백만의 '원주민'을 학살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역사는 죄(罪)이다. '역사의 화살'은 죄악의 방향으로 쏘아졌고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화살의 결말 역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3. 구원
그렇다면 원죄에서 구원받을 수는 없는가? 이 책에서는 '인본주의'가 그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다 빈치의 '비트루비오소적 인간'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와 현대에 와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로 발전했다. 유발 하라리는 둘 다 일신론적 신앙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상상의 질서'라는 죄를 지었고 그것에서 구원받으려 다시 '상상의 질서'를 동원하여 인본주의를 설계했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동어반복을 벗어난 유일한 기획은 '진화론적 인본주의'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흐름은 나치즘으로 좌절했으나 현재에 와서 '트랜스 휴머니즘'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것이 유일신교에서 벗어난 사피엔스의 역사의 화살이다. 여기서 종으로서 사피엔스의 역사는 끝난다.
4. 최후의 심판
이 책은 총 4부로 나뉘어 있는데 마지막 '과학 혁명'의 분량이 조금 긴 편이다. 사피엔스의 현재 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망은 마지막 챕터의 제목처럼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다. 사피엔스라는 종의 탄생은 인지혁명이었고 그것 자체가 원죄이기에 역사의 종말로서 심판을 받는다. 이 책의 더욱 냉소적인 부분은 그 심판의 주체가 신 같은 타자(他者)가 아닌 사피엔스 그 자신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형제를 죽이고 동물을 죽이고 원주민을 죽이고 이제 우리 자신마저 끝장내려 한다. 과학혁명을 통해서 발전한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비유기물공학은 -유발 하라리는 용어 사용을 피하려 하지만- 분명한 '트랜스 휴머니즘'적 기획이다. 유일신교에서 벗어난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기획은 초인의 탄생이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 실현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본질은 실존에 앞섰지만 이제부터는, 다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할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적 본능을 부정하고 구미에 맞게 기획하는 단계에 까지 도달한 것이다. 노화는 병이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최후의 심판' 이후 인간은 영생을 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사피엔스가 아닌 인류와 다시 한번 경쟁해야 할 지도 모른다.' (p.22)
5. 결론
앞에서 말했듯 워낙 많은 파라텍스트가 있는 책이기에 나의 잡문을 더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런 연유로 곁가지를 빼고 내가 생각하는 책의 핵심을 최대한 간결하게 적으려 했다. 원문 자체가 해석의 방법이 매우 풍부한 텍스트고 독자 개개인마다 접근 방법이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해석에 따라서는 곁가지가 더 중요한 책이다. 다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의 '원죄-심판' 서사의 편향성, 당파성은 지나치게 두드러진다. 인지혁명이라는 '이성' 자체를 '지식의 나무'라는 성경의 원죄 개념을 빌려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트랜스 휴머니즘'의 기획을 챕터 제목처럼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로 환유한다.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의 위기에 대한 질문에 환경, 기후를 거론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고 직설적으로 답했다. 자연은 아마도 인류를 절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을 절멸시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p.586)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유발 하라리의 시각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저자가 풀어낸 종말론 아래에서 우리 인간의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사회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인 '구조'(structure)와 '행위'(agency)의 대립과 맞닿아 있다. '사회'와 '개인'으로 치환하여 이해해도 된다. 유발 하라리에게 둘의 '조화'에 대한 인사이트는 없어 보인다. 대신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개별 유기체의 행복이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p.553) . 하지만,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p.346) 즉, 저자는 '개인적 서사'와 '역사적 서사'가 불화하는 지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 불화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고 명시한다. 개인은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역사의 화살은 일방통행이다. 그런 불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으로는 -저자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한- '명상'과 '불교'다. 인간은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의 결론은, 사회를 외면한 개인의 '달관'이다.
이런 태도는 얼마 전 접했던 에리히 프롬과 그 맥락이 통한다. 자본주의의 '시장적 성격' 아래에서 개인의 해답은 '명상'을 통한 생산적 성격의 성취다. 그런 결론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동료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모럴로 만들었다고 비난받았다. 학계에서 진지하게 취급받지 못하고 '대중 지식인'으로 남았다. 유발 하라리 역시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미 '대중 지식인'으로서는 지나치게 성공한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이 책은 '트랜스 휴머니즘을 통한 사피엔스의 종말'을 '역사적 서사'라는 도구로 풀어냈다. 서사의 알레고리는 기독교적인 '원죄'와 '최후의 심판'이다. 이런 결론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지식의 사용은 편향적이고 독자에 대한 태도는 은폐적이다. '사피엔스'의 서술의 근본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야기'라는 사악한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자 학계의 트렌드를 소개하는 '일반 교양서'로는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지식'으로서는 유니크한 서사적인 접근때문에 조심스러운 독해가 필요한 책이다.
6. 사족
나보다 영민하고 전문적인 독자들은 이 책의 헛점을 많이 발견했을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헛점들이 책 전체적인 구성과 방향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이 책은 '금속화폐론'의 입장이 강하다. '신용화폐론'적인 시각도 조금 소개해 본다. 수메르의 점토판은 책에서도 나왔지만 거의 모든 것이 '차용증'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포함한 '서사시', 즉 '내러티브'는 수천 개의 점토판 중에 단 세개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점토판 이전에는 '토큰'이 있었다. 동양의 '감합'과 용도가 비슷했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차용을 대신한 것이다. 토큰이 발달하여 점토판이 되었고 문자가 되었다. 문자는 신용이고 돈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돈을 쓸데없는 곳에 쓴 것이다. 이것은 일탈이다. 서사시는, 뒷담화는, 내러티브는, 인지혁명은, 종의 일탈이며 인간의 원죄다.
2. 저자는 19세기 이후 철학에서 죽음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반대로 실제 20세기 철학의 상당 부분은 죽음에 대한 주석이다. 많은 현대 철학은 니체와 하이데거의 생철학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서 인간을 해석하려 했고 '초인간'을 통한 극복을 말했다. 이런 철학이 저자가 분류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기반이 되었고 나치즘과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이어졌고 앞으로는 역사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3. '인터넷의 존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p.584) '대부분의 과학소설의 줄거리는 ...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 우리의 정서적, 사회적 긴장관계를 재생산하는데 불과하다'(p.581)는 대목은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실제 인간의 서사물은 이미 1940년대에 인터넷을 예견했었다. 저자가 어떤 이유로 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책의 서술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된다. 뒷 문장은 맥락상 과학소설이 트랜스휴머니즘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설명의 보충이다. 사실 20세기의 진지한 과학소설의 대부분은 트랜스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 오히려 트랜스 휴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사상 자체가 인본주의에 대한 과학소설적 탐구가 근원이다. 책 전체적인 '서사'의 강조에 비해 실제 '서사물'에 대한 몰이해는 지적하고 싶다.
4. '휴머니즘'이라는 범주에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휴머니즘, 진화론적 휴머니즘을 넣은 부분의 의도는 이해한다. '원죄'와 '최후의 심판'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독자로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책에서 '휴머니즘'의 범위가 너무 넓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나치즘, 트랜스휴머니즘까지 '휴머니즘'의 범주로 넣는 것은 용어에 혼란을 부른다. 실제로는 그런 방식으로 쓰이지 않고 책의 서술을 위한 저자 개인의 자의적인 구분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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